왜 3월 1일일까?
1919년 1월 22일, 고종 황제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갑자기 돌아가신 이유를 두고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와 일제가 고종 황제를 독살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라 안팎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들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었다. 고종 황제의 장례식은 3월 3일에 치러질 예정이었다. 장례식 날짜가 다가오자, 고종 황제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서울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이유는 안타깝게 죽은 고종 황제를 기리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나라 잃은 사람들의 설움과 울분을 한데 모아, 일제에 저항하는 만세 운동을 펼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3∙1운동과 유관순
3∙1 운동이 시작된 이후 두 달 동안 전국에서 열린 만세 운동은 약 1,500회에 달하고 여기에 참가한 사람은 200만 명이 넘었다. 청년들은 물론 나이 어린 학생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만세 운동에 뛰어들었다. 독립을 외치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자, 일제는 만세 운동을 막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했다. 일본 경찰과 군대는 평화적으로 만세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그 중 7,500여 명이 죽고 15,000여 명이 다쳤으며 46,0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전국 곳곳에서 일본군이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해치기도 했고, 감옥에는 만세 운동을 하다 잡혀 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 중에는 서울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도 있었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서 만세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체포된 유관순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끔찍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결국 감옥에서 죽음을 맞게되었다.
탑골공원에서 시작되었다 1919년 3월 1일에 울려 펴진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은 탑골공원에서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태화관에서 33명의 민족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수천 명의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탑골공원은 원래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어서 한때 탑을 뜻하는 파로다라는 말을 붙여 ‘파고다공원’이라고도 불렸는데, 1992년부터 다시 탑골공원으로 부르고 있다. 탑골공원의 정문 이름은 ‘삼일문’이다. 이곳에서부터 독립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음을 기념하고 오래오래 남기기 위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